[윤성민 칼럼] 한국의 87 체제, 아일랜드의 87 체제

입력 2024-01-10 17:58   수정 2024-01-11 00:08

지난해 마지막 날 일론 머스크가 X(옛 트위터)에 올린 한반도 야경 사진이 화제가 됐다. 한밤중에도 불빛으로 전역이 환한 남한과 전력난으로 평양 정도 외에는 모두 어둠에 잠긴 북한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 사진이다.

머스크는 이런 문구도 붙였다. “‘미친 아이디어: 한 나라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반으로 나눠 70년 뒤 어떻게 되는지 보자.”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교수인 대런 애스모글루와 사이먼 존슨,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제임스 로빈슨(현 시카고대 교수) 세 사람은 이미 2005년 머스크의 ‘미친 아이디어’를 주제로 논문을 썼다. 본래 한 나라였던 남북한이 왜 이렇게 엄청난 경제력 격차를 보이게 됐는지를 밝힌 ‘장기 성장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제도’란 논문이다. 답은 논문 제목에 있듯 제도, 곧 사회 시스템이다.

논문 저자 중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이 남북한 사례에서 영감을 얻어 동서양의 다양한 국가 흥망 사례를 같은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 유명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다. 저자들의 결론은 경제 제도가 포용적이냐 착취적이냐에 따라 국가의 성쇠가 좌우됐다는 것이다.

포용적 시스템은 사회 전반에 권력이 분산돼 있으며, 인센티브 추구로 작동하는 ‘기회’ 사회다. 착취적 시스템은 소수 특권층이 자원을 독점하고, 이들의 지대추구로 대다수의 인센티브가 좌절되는 ‘기득권’ 사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경제 제도의 포용·착취적 여부를 가르는 게 바로 정치라는 것이다. 정치 제도가 포용적이어야 포용적 경제 제도가 가동되고, 착취적 정치제도와 경제 제도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잘사는 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가 훨씬 많듯,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서도 정치가 발목을 잡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그래서 정치의 순기능이 더 빛난다. 20세기 후반 정치가 나라를 부흥시킨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가 아일랜드다.

‘유럽의 거지’ 취급받던 이 나라가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1987년 정치·사회적 대타협이었다. 당시 아일랜드 경제는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 모두 20% 안팎의 망국병을 겪고 있었다. 집권당(피어너 팔) 총리(찰스 호이)는 자원도 없고 일조량이 적어 감자 농사나 지어야 하는 나라에서 먹고 살길은 외국 자본밖에 없다고 보고 투자 유치 책으로 법인세율 대폭 인하와 함께 공무원 임금 삭감, 재정지출·연금 축소 등 개혁을 단행했다. 정부의 구조 개혁에 천군만마가 돼준 게 60년 앙숙인 제 1야당(피너 게일) 대표(앨런 듀크)였다.

야당 대표는 정책 협조에 더해 최대 노조를 끌어들여 노사 대타협의 세계적 귀감이 되는 ‘사회연대협약’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연간 250건에 달하던 파업이 50건 미만으로 줄고, 8년간 임금이 동결되기도 했다. 인텔을 필두로 외국 자본이 몰려와 유럽 소프트웨어 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가 됐으며, 세계 20대 제약업체 중 19곳을 유치했다. 1990년 1만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22년 13만달러로, 말 그대로 기적을 이뤘다.

1987년은 아일랜드뿐 아니라 한국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는 해다. 대통령 직선제로 정치 민주화의 큰 진전을 이룬 게 이때다. 이른바 ‘87체제’로 표현되는 당시 사회의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게 학생 운동권과 노조다. 그러나 두 세력은 민주화라는 초기의 순수성을 잃고 모두 특권·기득권층으로 변질했다. 학생 운동권은 김대중 정권 시절 386으로 제도권 정치에 들어온 뒤 486을 넘어 586, 686으로 연명하며 이제는 청산 대상 1호로 꼽히는 ‘밉상’이 됐다. 급속한 산업화의 희생양으로 인식되던 노동운동 세력은 공권력 위에 군림하려는 무소불위 정치 집단으로 변했다.

아일랜드의 87 체제가 정치 화합으로 출발해 국가 재건의 길로 내달렸다면, 한국의 87 체제는 투쟁으로 쟁취한 뒤에는 길을 잃고 분열과 파괴의 길로 치닫는 모습이다. 우리가 인구 500만 명에 외국기업이 수출의 80%, GDP의 25%를 차지하는 아일랜드와 같을 순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없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세계적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꼭 하나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정치개혁을 통해 국가 재도약을 일궈냈다는 점이다. 4·10 총선의 의미도 그러하다. 정치가 미래 지향적으로 바뀌어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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